오늘 필자는 베드로전서 1:8–12절을 본문으로 “구원을 보잗받은 성도들”이란 제목을 가지고 글을 써 나가려고 한다. 베드로 사도는 지금까지 하나님의 구원사역에 대하여 역설해 온 것을 알 수가 있다. 그런데 그 “구원”이란 것은 우연히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창세 전부터 우리 아버지 하나님께서 미리 계획하신 일이며, 이것은 선지자들을 통하여 이미 구약시대에 예언되었음을 강조한 것을 알 수 있다. 그래서 본문 10절 이하에 보면 “이 구원에 대하여는 너희에게 임할 은혜를 예언하던 선지자들이 연구하고, 부지런히 살펴서 자기 속에 계신 그리스도의 영이 그 받으실 고난과 후에 받으실 영광을 미리 증언하여, 누구를 또는 어떠한 때를 지시하시는지 상고하니라”라고 베드로가 설명하고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다시 말해서 성령께서는 선지자들을 감동시키셔서 메시아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과 영광을 미리 구약성경에서 증거하게 하신 것을 알 수 있다. 예를 들어서 이사야서 53장이 메시아의 고난 당하심에 대해서 미리 예언하였다면, 이사야서 11장은 메시아의 영광에 대해서 예언하며 노래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신약 시대에는 성령께서 복음 전도자들에게 역사하셔서 “구원의 복음”을 전하게 하신 사실을 알 수가 있다. 또한 천사와 같은 하늘의 존재들도 인간의 구원에 대하여 거대한 관심을 가지고 그 “구원”을 동경하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므로 “구원”이란 구약 시대나 신약 시대를 막론하고 하늘과 땅 모두가 관련이 된 “하나님의 우주적인 위대한 사건”이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성도들에게는 이처럼 우주 만물이 애타게 간절히 기다리던 “구원”이 보장되어 있으므로 우리 성도들은 그 어떠한 사건과 그 어떠한 고난 중에서도 능히 즐거워 하며, 능히 기뻐해야만 할 것이다.
첫째로 구원을 보장받은 우리 성도들은 우리 눈으로 예수를 보지 못하지마는 믿고 말할 수 없는 영광스러운 즐거움으로 기뻐해야만 할 것이다. 본문 8절에 보면 “예수를 너희가 보지 못하였으나 사랑하는도다. 이제도 보지 못하나 믿고, 말할 수 없는 영광스러운 즐거움으로 기뻐하니,” 여기서 “예수를 너희가 보지 못하였으나”에 대해서 3가지의 해석이 있음을 알 수 있다. 1) 이것은 양보적인 의미라기보다는 사실적인 의미를 강조하기 위함이라고 주장하는 학자가 있다. 2) 베드로 자신이 예수를 친히 목격했음을 수신자들과 비교하여서 강조했다고 보는 학자가 있다. 3) 베드로를 포함해서 수신자들 전체가 현재 계시하시는 예수를 보지 못한다는 점을 강조하는 표현이라고 보는 학자도 있다. 다시 말해서 여기서 베드로는 예수를 보지 못하나, 예수를 믿고 있는 수신자들을 칭찬하려고 이와 같은 표현를 하고 있다고 본다는 것이다. 우리는 이 세 가지의 견해들 중에서 마지막 세 번째 견해가 가장 타당하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수신자들이 비록 예수님을 눈으로 보지 못하나 예수를 사랑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우리 그리스도인들도 장차 종말론적인 보장으로 주어지게 될 칭찬과 영광과 존귀를 현재 우리 눈으로 볼 수가 없다 할찌라도, 믿음으로 우리가 이와 같이 영광스러운 것들을 바라보면서 날마다 즐거워하고 날마다 기뻐해야만 할 것이다.
둘째로 왜 우리가 예수를 보지 못하나 믿고서 영광스러운 즐거움으로 기뻐해야만 하는가? 그것은 바로 믿음의 결국, 곧 영혼의 구원을 받게 되기 때문인 것이다. 본문 9절에 보면 “믿음의 결국 곧 영혼의 구원을 받음이라.” 여기서 “구원을 받음이라”는 말에서 “받음이라”는 말은 NIV 성경에 “receiving”으로 현재 진행형으로 되어 있다. 이 말은 헬라어로 “코미조메노이”라는 말인데, 이 말은 “코미조”의 현재 중간태 뷴사로서, 구원이 지금도 실현 과정 가운데 있음을 강조하고 있는 말인 것이다. 참된 믿음의 결과인 미래에 주어질 종말론적인 보상은 영원하며, 온전한 구원 즉 온전한 “Salvation”이기 때문에, 현재 우리가 믿음을 소유하는 것은 그리스도의 재림 때에 주어질 상급을 누리는 것과 동일한 것이다. 그러나 실제적으로 온전히 완성되는 “구원”은 미래에 속해 있다는 것을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이다. 그래서 베드로는 이러한 구원에 대해 “영혼의 구원” 즉 헬라어로 “소테리안 프쉬콘”이라고 표현하고 있는 것이다. 이것 때문에 베드로가 “영”과 “육”을 구별하는 헬라어의 이분법적 사상의 영향을 받았다고 보기 쉬우나, 그렇지 않다고 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영혼”에 해당하는 헬라어 “프쉬콘”은 히브리적인 이해 속에서 볼 때에 “자아”나 “인격” 전체를 지칭하기 때문인 것이다. 그러므로 비록 베드로가 “프쉬콘”을 신체적인 생명으로 생각하였을지라도, 그것은 육체적인 죽음을 초월하는 생명인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의 믿음의 결국은 무엇일까? 결국에 믿음의 결국은 바로 우리의 “온전한 구원”이 되는 것이다. 베드로가 말하고 있는대로, 믿음의 결국이란 바로 우리가 “영혼의 구원”을 받을 뿐만 아니라, 우리의 변화된 인격 전체가 영원히 살게 되는 “완전한 구원”이 된다는 것을 기억해야만 할 것이다.
샛째로 이 구원에 대하여는 이미 구약의 선지자들이 예언하고 부지런히 살핀 것이요, 그리스도의 고난과 후에 받으실 영광을 미리 증언하였다는 것을 기억해야만 할 것이다. 본문 10절과 11절에 보면, “이 구원에 대하여는 너희에게 임할 은혜를 예언하던 선지자들이 연구하고, 부지런히 살펴서 자기 속에 계신 그리스도의 영이 그 받으실 고난과 후에 받으실 영광을 미리 증언하여 누구를 또는 어떠한 때를 지시하시는지 상고하니라. 이 섬긴 바가 자기를 위한 것이 아니요 너희를 위한 것임이 계시로 알게 되었으니, 이것은 하늘로부터 보내신 성령을 힘입어 복음을 전하는 자들로 이제 너희에게 알린 것이요, 천사들도 살펴 보기를 원하는 것이니라.” 앞에서 언급된 선지자들이 메시아의 고난과 영광을 연구하고 살피고 예언하여서 전했던 것을 12절에 와서는 “복음”이라는 말씀과 동일시하고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므로 구약 시대의 예언자들이 성령의 지시하심을 따라 말씀을 상고하여 메시아의 고난당하심과 영광을 예언하였던 바와 같이, 신약 시대의 복음을 전하는 자들도 성령을 힘입어서 메시아의 고난과 영광, 즉 “복음”을 그리스도인들에게 전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천사들도 본래 하나님의 계획을 전닿하는 존재들이기에 우리 인간들보다 훨씬 더 깊은 뜻을 알 수 있지마는, 구원의 계획은 너무나도 오묘하고 너무나 신비하여서 제대로 파악할 수가 없다고 하는 것이다. 천사들은 그리스도를 통한 하나님의 구속 사역이 실현되어서 하나님의 계획이 공개가 되고, 선포될 때에라야 비로소 깨닫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이 구원의 복음은 구약 시대에 선지자들을 통하여 예언되었고 증거되어 왔으며, 신약 시대에는 복음 전파자들을 통해서 선포되었고 증거돠어 오고 있으며, 또한 심지어는 천사들을 통해서도 이 구원의 복음이 전 세계에 전달되고, 전파되고 있다는 사실을 기억해야만 할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은혜로 이미 온전한 구원을 보장받은 우리 성도들은 “그리스도 중심의 복음”만을 붙잡고서, 좌로도 우로도 치우치지 말고 끝까지 인내하면서 저 천성을 향하여 지속적으로 정진, 또 정진해 나가야만 할 것이다. 아멘, 할렐루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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