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자의 어머니인 진희섭 권사는 현재 90세로서 한국의 김제시에 있는 노인아파트에 혼자 살고 계신다. 나의 어머니는 외할머니인 고 소삼영 권사(96세에 작고하심)의 7남매의 자녀들 중에서 장녀로 태어 나셨었다. 어머니는 이미 2008년 8월에 하나님의 부름을 받아 가신 아버지 이상욱 장로(80세에 작고하심)와 결혼하셔서 그 슬하에 4형제들을 두셨는데 필자가 그 중에 장남으로 태어 났었다. 어머니는 필자가 장남이라는 이유로 필자를 어렸을 적부터 끔찍하게도 아껴 주시고 사랑해 주셨다. 어린 시절에 “우리 장남 몸을 튼튼하게 해야 한다”고 어머니께서 말씀하시면서 필자에게 보약을 다려 주시곤 하셨었는데, 필자는 보약이라고 하니 입에 무척이나 쓰고 맛이 없어도 그 시커먼 보약 다린 것을 눈을 감고서 꿀꺽 꿀꺽 다 마시고 나면 어머니가 사탕 하나를 주시곤 하였었다. 그 사랑하는 어머니, 무척이나 필자를 애지 중지하셨던 어머니를 만나 뵈러 이렇게 펜데믹 시대에도 불구하고 필자의 아내와 함께 지난 9월 20일에 한국으로 출국하여서 어머니를 실컷 본 후에 10월 15일에 다시 귀국하려고 계획을 하고 있다.
나의 사랑하는 어머니는 지금도 우리 4형제들과 손주들을 위해서 매일 새벽마다 기도하고 계심에 감사드린다. 4형제들이 지금은 다 결혼을 해서 손주들 9명을 두시게 되었으니 이제 모두 식구들이 18명이다. 그 중에 두 손주들이 이미 결혼을 하여서 한 손주는 아이(증손자)를 하나 낳고, 한 손주는 갓 결혼을 하였으니 모든 식구들이 이제 21명으로 늘어나게 된 셈이다. 필자가 신학교에 다니던 시절에는 우리 가족들이 서울 봉천동에서 살고 있었는데, 그 때에 필자의 부모님은 어렵게 연탄 장사를 하시면서 생활을 이어가곤 하셨었다. 그 때에도 필자의 부모님들은 피곤한 몸을 이끌고 새벽마다 섬기는 교회에 새벽기도회를 열심히 다니시면서 우리 4형제들을 위하여, 섬기시는 교회를 위하여, 나라와 민족을 위하여 열심히 기도하셨었다. 그래서 필자는 우리 부모님들에 대해서 한 마디로 말한다면 “기도하시는부모님”이라고 말하고 싶다. 기도하시는 부모님의 덕택으로, 아니 하나님의 뜻 가운데에서 우리 4형제들 중에서 두 명이 목사가 되었는데, 목사 된 사람이 바로 필자와 우리 집에 셋째 동생이다. 장남인 필자는 부모님들이 결혼하셔서 아이를 낳기도 전에 하나님 앞에 서원기도를 하시면서 “하나님아버지! 저희가첫아이로만일아들을낳게된다면이아이를하나님의종으로바치겠습니다”라고 기도하셨었다고 한다. 그리고 나서 낳은 아들이 바로 필자였으니 필자는 어린 시절부터 목사가 되는 것이 꿈이요, 소원이었던 것이다. 어린 시절 아무 것도 모르던 시절에는 부모님들이 “너는 꼭 목사가 되어야 한다”고 말씀하시면, 필자는 “예! 꼭 그렇게 목사가 되겠습니다”라고 거침없이 대답하였었다. 그러다가 고등학교에 진학을 한 후로는 3년 동안 필자의 진로 문제를 놓고서 하나님 앞에서 많은 고민을 하면서 갈등을 겪었던 적이 있다. 그렇게 해서 약간 철이 들었던 고등학교 시절에는 하나님 앞에 부족한 종이 기도하기를 “하나님 아버지! 저는 목사가 되어서 교회를 섬기는 것이 아니라, 장로가 되어서 교회를 더 열심히 섬기겠습니다. 학교 교사가 되어도 좋겠고, 법조계에 들어가서 판사나 변호사가 되어도 좋겠습니다”리고 기도하였었다. 그렇게 3년 동안 방황하다가 고등학교를 졸업하던 해인 1973년 2월에 부모님과 함께 다니던 시골 교회에서 부흥회가 열렸었다. 부흥회에 부모님과 함께 열심히 참석하면서 월요일 저녁 부터 토요일 새벽까지 저녁 집회 뿐만 아니라, 새벽 기도회와 낮 성경공부 시간까지 모두 14번의 집회에 열심히 참석하였었다. 그 집회에서 하나님은 필자를 간절히 찾으시고 불러 주셨다. 첫날 첫 시간 부터 강사 목사님이 증거하시는 말씀을 들으면서 강력한 은혜를 받게 되었고, 집회시에 찬송을 부르면서도 큰 은혜를 받고서 하나님 앞에 두 손을 다 들고서 하나님의 뜻대로 순종하기로 작정하게 되었던 것이다. 그레서 우리는 부흥회의 마지막 저녁 집회인 금요일 집회를 마치고 난 후에 그 날 밤에 철야를 하면서 그 다음 날인 토요일 새벽기도회에 마지막으로 참석하기 위해서 몇몇 성도들이 난로 가에 모여서 기도하였었다. 그 때에 필자도 부모님과 함께 다른 성도들과 철야를 함께 하면서 돌아가며 간증하는 시간을 가지기도 하였다. 그 날 밤에 필자가 거기에 모인 성도들 앞에서 간증하면서, “저는이번부흥회에서많은은혜를받고오늘부터하나님의뜻대로순종하기로작정하였습니다. 저는부모님이서원하셨던대로앞으로신학교에들어가주의종이되어서일평생동안주님의복음을증거하면서살겠습니다. 제가하나님의부름을받아천국에가는그순간까지계속해서복음을증거하면서살아갈수있도록기도해주시기바랍니다”라고 간증하였을 때에 무엇보다도 필자의 부모님이 가장 기뻐하셨고, 다른 성도들도 기뻐하시면서 박수로 환호해 주셨던 기억이 있다. 그 길로 필자는 총신대학 입학 시험을 보게 되었고, 하나님의 은혜로 합격하게 되어 총신대학에서 4년 동안, 그리고 총신대학 신대원에서 3년 동안 연속으로 7년 동안 신학 공부를 모두 다 마친 후에 1980년 2월에 목사로 안수를 받고서, 군목으로 들어갔던 것이 필자의 목회의 시작이었던 것이다. 그 이후로 목사 안수 받은 지 벌써 41년째 한국에서 또는 미국에서 목회를 하면서 지금까지 나아오고 있다. 모든 것이 다 하나님의 은혜일 뿐이요, 무엇보다도 부모님의 기도 덕분인 것이다.
나의 사랑하는 어머니가 지금 90세 임에도 불구하고 지금도 섬기시는 교회에 매 주일마다 주일 에배와 수요일 예배에 꼬박 꼬박 참석하고 계시는 것을 보면서 존경하지 않을 수가 없다. 필자의 외할머니께서는 96세를 사시다가 하늘 나라로 먼저 가셨는데, 어머니는 지금 90세이시다. 90이심에도 하나님의 은혜로 귀도 밝으시고, 연세에 비해 정정하신 편이시다. 아무리 그래도 연로하시니 주일 에배 참석하기도 힘드실 텐데, 주일예배 뿐만 아니라 수요저녁예배에도 꼬박 꼬박 참석하신다고 하는 소식을 들으면서 고개가 절로 숙여지지 않을 수가 없다. 나의 사랑하는 어머니가 건강하셔서 외할머니만큼만 더 사셔도 감사한 일이요, 아니 그보다 더 사셔서 김형석 교수 나이 만큼인 101세를 사시면 더 감사한 일일 것이다. 어머니로부터 배운 신앙 때문인지 필자가 펜데믹 시대인 요즈음 주일 예배 2번, 수요 예배 2번, 그리고 새벽 기도회 5번 이렇게 매주 9번의 예배를 매주 인도하면서도 오히려 이 일이 즐겁고, 감사하고, 신나는 일이니 하나님 앞에 얼마나 감사한지 모르겠다.
나의 사랑하는 어머니는 우리 4형제들이 자랄 때에 언제나 “너희형제들끼리항상서로사랑하며서로우애해야한다”고 말씀하셨던 것이 바로 우리 가족의 가훈인 것처럼 되어 있었다. 이렇게 부모님의 간절한 소원대로 우리 4형제들 기족들은 현재 미국에 10명이 살고 있고, 캐나다에 2명이 살고 있고, 나머지는 한국에 9명이 살고 있으면서(총 21명), 서로 우애하고 서로 사랑하면서 서로를 위해 기도해 주면서 오손 도손 살고 있는 것이 전적으로 모두 하나님의 은혜라고 고백하지 않을 수가 없다.
나의 사랑하는 어머니! 앞으로 남은 생애에도 더욱 건강하시고, 더 우리들을 위해 기도 많이 하시면서 오래 오래 장수하시기를 기도합니다. 지난 2019년도에 뵈었었고, 이번에 뵈었으니 또 앞으로 2년 후에 다시 뵙도록 하겠습니다. 새찬송가 199장에 있는대로, “그때일은지나고나의눈에환하오, 어머니의말씀기억하면서, 나도시시때때로성경말씀읽으며주의뜻을따라살려합니다. 귀하고귀하다, 우리어머니가들려주시던재미있게듣던말이책중에있으니, 이성경심히사랑합니다.” 나의 사랑하는 어머니가 읽으시던 성경책, 나의 어머니가 사랑하며 늘 읽으시던 성경책, 필자도 이 성경을 사랑하면서, 나의 어머니처럼 필자도 남은 여생 기도 생활에 힘쓰며, 예배 드리는 일에 최선을 다하며, 형제 사랑을 위해 헌신하며 수고하면서 살아가기를 간절히 소원합니다. 아멘, 할렐루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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