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에 전도자로 활동하였던 위대한 인물들 중에 “바나바”(Barnabas)라는 사람이 나온다. 이 바나바라는 이름의 뜻은 “위로의 아들”이라는 뜻이다(사도행전 4:36). 사도행전 4:36-37절에 보면, “구브로에서난레위족사람이있으니이름은요셉이라사도들이일컬러바나바라(번역하면위로의아들이라)하니, 그가밭이있으매팔아그값을가지고사도들의발앞에두니라”는 말씀이 나온다. 그러니까 바나바는 원래 구브로 사람이요, 레위족이었으며, 그의 본 이름은 요셉(Joshep)이었는데, 사도들이 그가 위로하는 일들을 많이 하는 것을 보고서 그의 이름을 “바나바”라고 불렀던 것을 알 수가 있다.
바나바라는 전도자는 첫째로는 그가 밭이 있었는데 그 밭의 값을 가지고 사도들의 발 앞에 두었다고 그랬으니까 그는 매우 헌신적인 사람이었던 것을 알 수가 있다(행4:36-37). 그러면 헌신이란 무엇을 의미한가? 로마서 12;1절에 보면, “그러므로형제들아내가하나님의모든자비하심으로너희를권하노니너희몸을하나님이기뻐하시는거룩한산제물로드리라”고 말씀하고 있다. 여기에 보면, 헌신이란 바로 자신이 하나님께 “제물”이 되는 것이다. 제물이란 어떤 것을 그 원래의 위치와 용도에서 분리하여 하나님의 제단에 하나님을 위하여 특별히 올려 놓는 것을 의미한다. 제물이 되는 것은 바로 하나님이 쓰시도록 하나님께 바치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우리 자신을 하나님께 산 제물로 드리려고 할 때에는 다음과 같은 두 가지의 방면이 있다. 그 하나는 위치가 바뀌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용도가 바뀌는 것이다. 우리가 이러한 헌신의 의미를 깨닫는다면 다른 사람들의 헌신이 참된 헌신인지 아닌지를 분별할 수도 있게 되는 것이다. 바나바는 원래 자기의 밭이 있었다. 그런데 그가 그것을 팔아서 그 밭값 전부를 사도들의 발 앞에 두어서 하나님의 일을 위해 사용할 수 있도록 모두 다 드렸던 것이다. 이것이 바로 헌신임에 틀림이 없다. 그러므로 헌신이란 말로만 하는 것은 참 헌신이 아니다. 참 헌신이란 실제로 자신의 몸을 하나님께 산 제물로 드리든지, 아니면 자신의 물질을 하나님께 드리든지, 아니면 자신의 시간을 하나님을 위해 드리는 것이다. 그러니까 실제로 희생적으로 하나님을 위해 헌신하는 일을 실행에 옮겼을 때에 그를 가르켜 비로소 헌신적인 사람이라고 말할 수가 있는 것이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바나바와 같은 헌신적인 성도들이 모두 다 되어지기를 간절히 바란다.
둘째로 바나바라는 전도자는 곤란에 처한 다른 사람을 위해 사람들 앞에 변호해 주므로 그 사람을 위로해 주는 사람이었다. 사도행전 9:27-28절에 보면, “바나바가데리고사도들에게가서그가길에서어떻게주를보았는지와 주께서그에게말씀하신일과다메섹에서그가어떻게예수의이름으로담대히말하였는지를전하니라. 사울이제자들과함께있어예루살렘에출입하며”라고 되어 있다. 그러니까 사울이 처음에는 믿는 사람들을 핍박하며, 박해하고 포행자로 살았었지마는 그가 하나님의 예정 가운데 다메섹 도상에서 빛으로 나타나신 예수 그리스도를 만난 이후에는 완전히 변화되어서 예수를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증거하며, 예수를 그리스도라고 증거하는 전도자가 되었던 것이다. 이렇게 변화를 받은 사울이 3년 만에 예루살렘 교회에 방문을 하였을 때에 누구 한 사람도 사울을 반갑게 맞아 주는 사람이 없었다. 사도들도, 성도들도 모두 다 사울이 성도들을 혹독하게 박해했던 사실을 알고 있기 때문에 그랬던 것이다. 본인이 사람들에게 자신이 이제는 제자가 되었다고 아무리 설명을 해도 그 누구 한 사람도 그것을 믿지를 않았던 것이다. 그러던 차에 먼저 전도자가 되었던 바나바가 사울을 데리고 사도들에게 찾아 갔던 것이다. 그리고 사도들에게 그가 다메섹 도상에서 어떻게 주를 보았는지에 대해서 설명하고, 주님께서 그에게 말씀하신 일에 대해서도 설명하고, 또한 다메섹에서 그가 어떻게 예수의 이름으로 담대하게 복음을 전하였는지를 설명해 주었을 때에 그제서야 사도들과 예루살렘 교회 성도들이 사울을 인정하게 되는 것을 알 수가 있다. 그 후로는 사울이 제자들과 함께 교제할 수가 있었고, 예루살렘성과 예루살렘 교회에 자유롭게 출입할 수 있었던 것을 알 수가 있다. 이처럼 바나바는 사울을 사도들 앞에서 변호해 주므로 사울로 하여금 예루살렘 교회에서 인정을 받도록 하였으며, 사울을 위로하는 일과 격려하는 일에 큰 역할을 한 것을 알 수가 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도 이와 같이 바나바처럼 위기에 처한 사람을 위해 변호해 주며, 그를 격려해 주고, 위로하는 일에 앞장서야만 할 것이다.
사도행전 13장에 보면 바나바와 바울이 안디옥 교회의 파송을 받아서 바나바의 조카인 마가를 데리고 제1차 전도 여행을 함께 떠나게 되는 것을 볼 수가 있다. 바울은 제1차 전도 여행지였던 구브로에서의 사역 이후에 그의 이름이 사울에서 바울로 바꾸게 되는 것을 알 수가 있다. 그리고 처음 출발 할 때에는 바나바와 사울이라고 기록되었던 이름이 사도행전 13:46절에 보면, 처음으로 바울과 바나바로 바뀌어 기록되고 있는데 14장에서 바나바와 바울이라고 다시 기록되었다가 15장 이후에는 완전히 바울과 바나바로 바뀌게 되는 것을 알 수가 있다. 특히 15장은 제1차 전도여행을 마치고 바울과 바나바가 예루살렘에서 열린 사도회의에 참석하는 장면이 나온다. 그런데 성경의 기록에 의하면 바나바와 바울의 위치가 뒤바뀌어 있다. 한 마디로 바울이 앞장을 서게 되고 바나바는 뒤로 물러난 듯한 인상을 주는 것을 알 수가 있다. 마가가 전도여행의 여러 가지 어려움들을 견디지 못하여서 제1차 전도여행 때에 중도에 포기한 것을 바울은 몹시 언짢게 여겨서, 제2차 전도여행 때에는 마가를 동반하는 것을 강력하게 거절하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로 인해서 바나바와 바울이 서로 의견 충돌이 생겨서 서로 크게 다투기도 하였는데(사도행전 15:37-41), 바나바는 마가를 너그럽게 다시 받아들여서 배 타고 구브로로 함께 가므로 결국에 마가로 하여금 대 전도자가 되게 한 것을 알 수가 있다. 그러나 바울은 마가를 강력하게 거절하고, 다른 전도자인 실라를 택한 후에 형제들에게 주의 은혜에 부탁함을 받고 떠나서 수리아와 길리기아로 다니면서 교회들을 견고하게 한 것을 알 수가 있다(사도행전 15:40-41). 그러므로 바나바는 세번째로 관용의 사람이었던 것을 알 수가 있다. 물론 바울이 제2차 전도여행 때에 마가를 거절하므로 실라를 데리고 떠나게 되었었지마는, 디모데후서 4:11절에서 “네가올때에마가를데리고오라. 저가나의일에유익하니라”고 디모데에게 말한 것을 보면, 결국 바울도 말년에는 마가를 인정하게 되었던 것을 알 수가 있다. 바나바는 마가가 실수를 하였음에도 불구하고 그의 허물을 감싸 주면서 그를 관용하는 마음으로 그를 데리고 함께 배를 타고 구브로로 전도 여행을 떠났던 것을 알 수가 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도 상대방에게 허물이 있고 비록 실수가 있다 할찌라도 그것을 사랑으로 용서해 주고 감싸 주며, 그를 관용하는 마음으로 받아 들일 줄 아는 지혜가 있어야만 할 것이다.
그래서 오늘은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이렇게 혼탁하고도 매우 혼란스러운 위기의 시대 속에서 살아가고 있다 할찌라도 전도자 바나바와 같은 삶의 자세를 가지고 살아간다면 참 좋겠다고 하는 마음으로 이 글을 쓰고 있는 것이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바나바처럼 주님의 영광을 위해서 자신을 희생하는 헌신적인 삶을 살아가며, 주위에 어떤 형제나 자매가 인간 관계 때문에 곤경에 처해 있을 때에 그를 만인이 보는 앞에서 강하게 변호해 주므로 그에게 위로가 되며, 격려가 되게 하는 삶을 살아가며, 또한 상대방의 허물이나 실수를 주님의 사랑으로 감싸주므로 서로 용서하며 넓은 마음으로 관용해 주는 삶으로 살아가기를 간절히 소원한다. 기록에 의하면 세계 선교에 큰 업적을 남겼던 이 바나바는 말년에 구브로 섬으로 다시 돌아가서 거기서 열심히 복음을 전도하다가 유대인들이 폭동을 일으켰을 때에 돌에 맞아서 비참하게 순교를 당하였다고 한다. 이 때가 바로 A.D. 73년 경이라고 한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이 바나바와 같은 삶을 살아가게 될 때에 온 세상에 그리스도의 찬란한 빛과 소망과 사랑이 넘치게 될 것을 분명히 확신한다. 아멘, 할렐루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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